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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컬처리뷰

공소시효 만료된 살인범의 이야기 '내가 살인범이다'

11월 8일에 개봉한 <내가 살인범이다>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7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몰이 중이다. 정병길 감독의 화려한 액션신과 박시후, 정재영의 탄탄한 연기력도 흥행의 한 요소겠지만, 대중들이 이 영화에 가장 흥미를 느끼는 점은 ‘공소시효가 끝난 살인범이 매스컴을 통해 대중 앞에 등장’한다는 소재일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미해결사건으로 남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공소시효가 끝나 사회에 나왔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더 이상 처벌할 수 없는 그 범인이 대중 앞에 당당히 설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이 영화는 어떤 대답을 던지는지 살펴보자.


<출처: 네이버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는 공소시효가 끝난 살인범이 자기고백을 담은 자서전을 발간하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986년에서 1990년까지 있었던 연곡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15년 후, 공소시효가 만료됨과 동시에 유가족들이 범인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회적 권리 또한 박탈됐다. 사건을 맡았던 담당 형사 최형구(정재영)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나, 그로부터 2년 뒤 범인 이두석(박시후)은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책을 들고 카메라 앞에 등장했다. 그의 범행을 낱낱이 적어 발간한 자서전 맨 뒤에는 ‘이 책을 최형구 형사와 모든 유가족들에게 바칩니다.’라는 멘트가 적혀져 있고, 책 앞에는 눈물을 흘리는 그의 사진이 프린트돼 있다.

그가 책을 들고 매스컴 앞에 등장하자마자 엄청난 사회적 관심이 쏠린다. 이두석을 비난하며 과거 행적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고 심지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억만장자가 되거나 수려한 외모 때문에 열성 팬클럽이 생기는 등의 아이러니한 반응을 보였다. 방송국들은 특종이라며 이 자극적인 사건을 빠르게 보도하는 데만 급급하다. 이에 유가족들은 분통이 터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를 헤치려 하나 경호원들 때문에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최형구 형사는 이두석을 거세게 비난하면서 그 죄 값을 치러야 한다며 사회에 외친다.

 

영화에 등장하는 연곡 연쇄살인사건은 화성 연쇄살인사건(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일대에서 10명의 부녀자가 살해됐으나 범인이 잡히지 않은 미해결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2006년에 만료하여 범인을 잡아도 처벌할 수가 없다. 이 때 당시에 범인으로 J군이라는 인물이 지목됐다. J군은 수원여고 강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수사를 받아가 허위자백으로 풀려나 J군을 조사한 담당수사관들이 직위 해제되고 구속되는 등의 해프닝이 벌어졌었다. 당시 담당수사관들은 J군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라 믿고 있었으나, 결국 이 사건은 지금까지 미해결로 남은 채 공소시효까지 만료됐다.

이와 같이 공소시효가 만료된 살인사건은 실제로 많다. 대표적인 대한민국 미제사건으로 남은 대구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1991년 대구에 살던 다섯 명의 초등학생들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실종된 사건이다. 당시 정부는 경찰과 군을 대대적으로 투입해 현장 주변을 수색하고 전국적으로 수배 전단을 배포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사건 발생 11년 만에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됐지만, 사망 원인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2006년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면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영화<아이들>로 만들어져 다시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 바 있다.

영화 <그 놈 목소리>로 전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91년 이형호군 유괴살인사건 역시 공소시효가 만료돼 영원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이형호군은 91년 1월 압구정 동네 놀이터에서 납치를 당했고, 납치 43일 만에 한강 둔치의 배수로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발견 즉시 경찰은 수사를 공개수사로 전환하고 28만장의 전단과 음성테이프 1천개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지만 끝내 범인은 잡지 못했다. 결국 이 사건도 2006년으로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2009년 개봉된 영화<이태원 살인사건>으로 다시금 조명을 받은 이태원 살인 사건은 공소시효가 만료될 뻔했으나, 만료되지 4개월 전 가까스로 범인을 추적해 기소함으로써 15년 만에 억울한 피해자의 혼을 달랠 수 있게 되었다. 

1997년 홍익대 휴학생 조중필(당시 22세)씨가 이태원의 한 패스트푸드점 화장실에서 목과 가슴 등을 흉기로 9차례 찔려 살해됐다. 해당 사건은 유력한 용의자끼리 서로 범행 사실을 떠넘김으로 인해 ‘가해자 없는 사건’으로 불렸으며 당시 체포된 한인 에드워드 리는 사건 2년 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아더 패틴슨은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됐으나 출국정지가 풀린 사이 미국으로 출국했다. 영화<이태원 살인사건>이 개봉한 후 사회적으로 진범을 잡으라는 여론이 거세지자, 2010년 11월 재수사 끝에 패터슨이 진범이라는 결론을 내려 공소시효가 끝나기 4개월 전 그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이 외에도 해결되지 못한 채 묻혀있는 사건들이 많다. 최근 5년 동안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이 불가능한 흉악범죄 사건이 80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력을 동원해 치밀하게 수사를 전개해도 사건의 진위를 밝혀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유가족들보다 먼저 가해자를 심판할 것을 포기하고 사건을 손 놓는 경우도 많다.

최근 10년간 수사본부까지 설치하고도 범인을 잡지 못한 미제 강력사건은 모두 12건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수사본부도 해산돼 사실상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이나 '고 김성재 군 사건'의 경우도 범인을 잡지 못한 채 2012년 공소시효가 끝나고 말았다. 심지어 미제사건 파일을 검토해 가해자를 체포했음에도 공소시효가 지나서, 증거불충분으로, 불구속입건하고 집으로 돌려보낸 사건도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 등의 선진국은 공소시효가 없다. ‘영원히 네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공소시효를 비록 25년으로 늘리긴 했으나, 최근 공소시효를 없애고 중범죄의 형량까지 높인 일본에 비해 범죄자에게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 수사기법이 발달해, 경찰서 안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사건 파일을 다시 꺼내 조사한다면 충분히 범인을 잡을 수 있다고 한다. 공소시효를 폐지하고 해당 사건을 전담하는 수사반을 만들어 다시 수사를 진행한다면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다행히 법무부는 사회적 여론을 반영해 올해 6월13일 살인죄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형사소송법 일부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법무부는 형사소송법 253조 2항에 ‘공소시효의 적용 배제’를 신설했다. 개정안에 대해 7월23일까지 의견을 수렴한 뒤 국무회의 등을 거쳐 국회에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특히 1997년 이후 일어난 사건도 공소시효 무효화를 소급적용해 진범을 잡으면 언제든 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르면 올해 하반기 공소시효가 폐지된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한편 공소시효를 둠으로써 수사가 빨리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폐지할 시에 수사가 느슨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또한 공소시효 동안 범인이 겪은 정신적, 심리적인 고통을 감안해서 공소시효 폐지를 반대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법이라는 것이 개인 간의 사사로운 복수를 막는 대신 국가의 이름으로 처벌해주는 정의로운 제도라면, 범죄자의 인권에 관대하기보단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심정을 더 헤아리는 것이 정의로운 게 아닐까?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비판하는 내용은, 외모지상주의, 언론 통제와 자극적인 사건보도, 무비판적인 팬클럽 문화 등도 있지만, 결국에 공소시효에서 볼 수 있는 우리나라 법체계의 허점일 것이다. 국민의 공통된 질서를 반영하는 법체계가 공소시효로 범인을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면, 유가족의 찢어지는 가슴과 피해자의 피눈물을 무시한 채 대중마저 용서를 말할지 모른다.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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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 김가윤 /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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