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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컬처리뷰

한국인이라면 꼭 봐야 할 단 하나의 연극


<출처 : 플레이DB>

6월 5일부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연극 <산불>. 실은 그동안 TV에서만 봤던 강부자, 조민기, 장영남 같은 배우들의 연기를 직접 현장에서 느낄 수 있다는 매력에 끌려 하고 많은 연극 중 <산불>을 택했다. 

사실 <산불>은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최고봉인 고 차범석의 대표작이고, 이번 공연이 그의 5주기 추모 특별 공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는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전후 문학의 1세대였다. 전통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희곡 작품을 발표했으며 한국적 개성을 살린 사실주의 극을 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의 작품은 전쟁과 이데올로기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본능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의 중심을 시대 상황이 아닌 인간 실존에 두었기 때문에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한다.

 

과부촌에서 생긴 비극

살을 에는 추위에 으스스 온몸을 떨며 쌀을 모으는 산골 아낙들. 쌀이 없어 못 내겠다는 아낙과, 죽지 않으려면 군대에 보내야 하니 쌀을 내라는 반장 할머니의 다툼이 벌어진다.
그렇다. 연극 <산불>의 배경은 6·25 전쟁이다. 전쟁으로 남자라곤 노망 든 늙은이 한 사람뿐인 과부촌에 ‘규복’이라는 한 젊은 남자가 숨어 들어온다. 공비로 쫓기는 규복을 발견한 과부 점례는 규복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숨겨주고 밥도 준다. 그러다가 점례는 동정심이 싹트면서 두 사람 사이에 애욕이 싹튼다.

이때 과부병에 걸리다시피한 이웃집 사월이가 이를 목격하고 점례에게 규복을 공유하자고 제의한다. 거절하면 신고하겠다는 사월의 협박에 못 이겨 점례는 규복이 있는 곳을 알려주고 이를 시발점으로 세 사람 간에 갈등이 생긴다.

처참한 전쟁과 상반되는 따스한 봄날, 사월이는 결국 규복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 이를 안 규복은 자수도 못 하고 도망도 못 치는 사면초가의 상태에서 국군의 소탕작전으로 숨어 들어간 대나무 밭 속에서 불에 타 죽는다. 동일한 시각에 임신을 한 사월이도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을 한다. 그렇게 산불 속에서 한 쪽은 자살한 딸을 놓고 다른 한 쪽은 불타는 논밭을 보고 다른 한 여자는 죽은 남자 앞에서 통곡을 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출처 : 플레이DB>

 

전쟁 속에 터져버린 인간의 욕망

 
이 작품은 2년 동안 욕망에 굶주린 과부들과 공비로 쫓기면서 성욕에 허기진 한 남자의 본능을 충실히 보여줬다. 점례와 사월, 그리고 규복이 욕망에 의해 처참히 무너진 것은 오랜 전쟁에 때문이다. 전쟁과 이데올로기 싸움이 인간을 얼마나,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중점으로 다루었다는 점에 이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자신의 본능과 욕망을 표현하는 방식은 각각 달랐다. 사월이는 점례에게 규복을 나눠 갖자고 적극적으로 제안할 만큼 자신의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반면 점례가 규복과 그런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점례의 주변 인물로선 놀라운 일이다. 점례는 딸린 가족 때문에 다시 시집을 못 간다는 참한 과부이기 때문이다. 즉, 점례도 마찬가지로 내면에 숨은 본능과 욕망이 있었으며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나왔던 것이다.

극의 마지막에 보여준 산불은 욕망과 본능 때문에 무너진 세 사람의 상태를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한다. 사월이가 점례에게 제의하기 전에 규복은 자수하겠다고 점례와 약속했다. 자수를 하면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사월이가 모른 체했다면 점례와 규복은 자수를 하든가 도망갔을 테고, 사월이 또한 임신을 하지 않아 자살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규복도 마찬가지로 사월이를 탐하지 않았더라면 자수를 해서 살 수는 있었을 것이다. 물론 세 사람 모두 이를 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오랫동안 꾹꾹 누른 욕망이 터져 나와 결국은 산불과 함께 욕망도 사람도 다 같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출처 : 플레이DB>

 

극을 살린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산불>은 정통 연극이라 다소 지루할 것 같았으나, 배우들의 연기가 그 우려를 말끔히 사라지게 했다. 주연부터 조연까지 부족함이 없었다. 이날 관객들이 특별히 환호하고 찬사를 보낸 배우 두 명의 연기는 감탄을 자아냈다.

사월이 역의 장영남은 역시 기대치보다 더한 만족을 줬다. 사월이의 욕망을 온몸으로 표현해 내는 것하며 기가 막혀 헛웃음을 치는 것하며 약간의 철없는 모습, 실성한 듯한 표정과 몸짓까지 다양한 연기를 보여줬다.

규복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점례에게 소중한 남자는 내게도 소중한 거요."라며 억제해온 욕망을 웃음 포인트도 함께 살려냈다. 또한 규복의 존재를 알았을 때, 굶주린 욕정이 스멀스멀 올라와 있는 상태를 반짝이는 눈빛과 팔딱거리는 표정으로 나타냈다. 임신을 해 절망에 빠졌을 때는 초점 잃은 눈빛과 모든 의욕이 빠져나간 몸짓으로 표현했다. 

조연으로는 바보 귀덕이 역의 이태린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바보 역을 훌륭히 소화해 지루할 수도 있는 연극에 재미를 더하고 몰입을 이끌었다. "저건 뒈졌어야 해!" 하는 어머니의 독설에 웃다가 우는 잠깐 사이의 표정 변화와 바보만의 몸짓과 목소리까지 생생함을 전했다. 어머니가 군인에게 끌려가는 위기 상황에도 혼자 명절날인 양 들뜬 몸짓과 목소리로 바보만의 순수함을 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눈을 번뜩 뜨고 입이 귀에 걸릴 만큼 크게 웃는 바보만의 모습에 관객들은 귀엽다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극 <산불>은 한국 사실주의 극의 대표작이라는 의미도 있고, 배우들의 연기 또한 최고였다. 하지만 공감대가 완전하게 형성되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다. 아마도 인물 간 갈등 상황을 너무 간결하게 그려서인 듯하다. 사월이와 규복이가 서로 대화를 하는 장면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부분을 관객에게 맡긴 것 같다. 6·25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던 젊은이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인물들의 갈등 관계와 심리 상태를 좀더 섬세하게 표현했다면 세대 불문하고 함께 공감대를 만들 수 있었을 것 같다. Ahn

 

대학생기자 류하은 / 강남대 경영학과 
 
거거거중지(去去去中知),  행행행리각(行行行裏覺)
가고 가고 가는 중에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고 또 행하면서 깨닫게 된다.
- 노자의  <도덕경> -
제 글이 조금이나마 당신이 가는 그 길에 빛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